증언4 - 가해기관 : 정치범수용소 18호 관리소

등록일 2016.11.14


안녕하십니까? 이광백입니다.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1987년부터 2010년까지 24년간 북한 정치범수용소 18호 관리소에서 인권 유린을 당했던 박주용 씨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 북한에선 정치범수용소 형기를 다 마친 사람들에게 ‘해제민’이라는 이름을 붙이죠. 사실상 정치범이란 낙인으로부터는 풀어주는 조치를 취한다는 건데, 주용 씨도 해제민이었죠? 해제민이 되면 수용소 밖을 나올 수 있나요?

석방되는 건 아니고요, 외출증을 끊어 장을 보러 나오거나 여행증을 끊어 친척집을 갈 수는 있습니다. 다만 외출증을 받는 데도 다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바로 위 상사에게 출입증(외출증)을 끊겠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다시 자신의 상사에게 물어야 하고요. 이렇게 단계별로 위로 보고가 올라가 보위부의 허가까지 내려져야 외출이 가능해지는 겁니다.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죠. 그래서 외출도 자주 해봤자 한 달에 한 번 가능한 수준이에요. 그것도 집에 재력이 있어야 가능하지, 돈 없는 집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재력이 없는 집은 굳이 나갈 필요도 없어요. 사실 외출은 돈이 있어 물건을 사러 가거나, 친척집을 방문하려고 하는 건데, 애초에 돈이 없는 사람은 나가봤자 뭐라도 살 수가 없으니 그냥 수용소 내에 있는 겁니다.

- 정치범 형기가 끝나는데도 어째서 사회로 석방시키지 않고 수용소 안에서 살게 하는 건가요?

글쎄요, 간부들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제민이 돼도 이주민(정치범)과 계속 섞여 살아야 하죠. 수용소에서 살 때도, 학생들은 이주민이든 해제민이든 학교를 같이 다녔고 집도 해제민과 이주민이 이웃으로 살았어요. 차이점이 있었다면 공민증의 색깔이 달랐다는 것이었는데, 해제민은 빨간색, 이주민은 검정색이었습니다. 2009년에는 수용소 안에 철조망이 하나 생기더라고요. 해제민과 이주민을 갈라놓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 해제민과 이주민 사이에 차별도 존재하나요?

어린 아이들은 이주민끼리, 해제민끼리 따로 노는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애들은 어리니 그렇다 할지라도, 선생들까지 차별을 너무 심하게 했습니다. 이주민과 해제민 아이들에게 따로따로 놀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질 않나, 심지어 처벌을 내릴 때도 이주민 아이들에게 더 가혹하게 했어요. 같이 지각을 해도 해제민 아이에게는 말로만 혼냈지만, 이주민 아이에게는 체벌도 가했죠. 종아리를 많이 때렸어요.

- 그럼 그나마 해제민이 되면 폭행이나 노동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나 보군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학교나 사회에서 해제민과 이주민에게 가해지는 욕설과 체벌 수위가 좀 다르긴 하겠지만요.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오늘 8시간 안에, 혹은 12시간 안에 석탄 몇 톤을 캐라고 지시를 했는데, 시간 안에 일을 완료하지 못하면 작업반장이 화를 내겠죠. 그런데 해제민에게 왜 이렇게 밖에 일을 못했느냐고 욕하는 정도라면, 이주민에게는 일이 끝나도 나가서 석탄을 더 캐오라고 지시합니다. 이것도 지령장 마음이에요. 기분이 좋은 날은 그냥 욕으로 때우지만, 기분이 나쁜 날에는 24시간 잡아두고 일을 시키는 겁니다.

해제민이라 해도 폭행을 당하는 일은 많았어요. 해제민들 사이에서도 재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체벌 강도가 달랐죠. 집에 재력이 있어서 뇌물을 고일 수 있으면 폭행이나 욕을 덜 하는 식이었습니다. 심지어 지령장이 (뇌물을 받으면) 출근한 해제민에게 “그래, 출근했니?”라고 물어봐주기까지 했어요. 한국에선 상사가 알은체 해주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곳에선 굉장히 드문 일이었거든요.

- 그렇군요. 주용 씨는 해제민이 돼서 외출도 했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외출했다 돌아와 폭행까지 당했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당시 19살이어서 공민증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여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증명서를 떼려면 직속 상관에게 먼저 여행증 부탁을 해야 했는데, 그냥 줄 사람이 아니었어요. 뇌물을 고여야 했죠. 하지만 저는 뇌물을 고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출증 조작을 결심했습니다. 일단 옆집에 사는 동생의 출생증을 빌렸고, 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 책상 서랍에서 몰래 훔쳐뒀던 외출증 용지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제 이름과 담임선생님 이름을 멋대로 외출증에 쓰고 다녀온 것이죠. 그렇게 몇 번 외출하고 나니 외출증을 다 쓰고 말았지 뭐예요. 하지만 다행히 외출할 때마다 철조망 상태를 미리 봐뒀습니다. 그래서 당시 옆집에 살던 금옥이와 함께 (철조망 밑으로) 도망쳤어요.

당시 사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도 일 나갔다 돌아오시면 집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셨고, 언니도 친척집에 도움을 받으러 갔다가 잡힌 이후로 무보수로 노동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집안을 살리기 위해 총대를 메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순간 너무 힘들어서 죽든 살든 도망치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옥이와 수용소 탈출을 시도했어요. 금옥이는 탈출 후 함경남도 쪽으로 갔고, 저는 청진으로 도망쳤는데요. 친척집을 찾아가는 길이 어찌나 고생스럽던지요. 우여곡절 끝에 친척집에 도착해 밥을 한 술 뜨는데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고요. 어머니는 집에서 굶고 있을 테고, 언니도 무보수로 일하고 있을 텐데 저만 친척집에서 밥을 먹으니 자책감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집에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어요. 친척들은 너무 놀라 저를 절대 안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굶어도 엄마랑 같이 굶겠다고, 지금 가지 않으면 엄마만 처벌 받을 거라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삼촌이 저를 다시 되돌려 보내기로 결심했어요. 그 때 삼촌이 먹을 양식과 이것저것 짐을 싸주셨죠. 특히 삼촌은 당시 강산 지배인 일을 하고 있어서 무사히 증명서를 만들어 제게 쥐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 길로 저는 관리소로 돌아갔고, 초병에게 삼촌이 싸준 짐으로 뇌물을 고이며 초소만이라도 통과시켜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무탈 없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제 모습이 많이 달라졌었나 봐요. 수용소 안에서는 그저 까무잡잡했는데, 사회물을 먹으니 옷도 깔끔하고 먹기도 잘 먹어 살도 올랐었거든요. 동네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옆집에서 저를 신고를 했더군요. 엄마는 이미 끌려가 맞은 상태였어요. 보통 작업장에 나오지 않으면 지령장이 확인원을 시켜 결석한 사람을 데려오게 하는데, 그 확인원에게 폭행을 당한 거예요. 저 역시 끌려가 폭행당했습니다. 나중엔 지령장에게도, 그리고 맨 윗사람인 보안소장에게까지 불려가 맞았어요.

- 얼마나 심하게 맞으셨나요?

야구 방망이만큼 두꺼운 몽둥이로 마구 맞았어요. 수용소 안에서는 간부들이라면 그런 몽둥이 하나씩은 다 갖고 있습니다. 한 30분 정도 맞은 후로는 기억이 없어요. 제 이빨을 뽑겠다며 강제로 입을 벌리고 몽둥이로 때려 앞니가 깨졌던 것까지 기억나요. 기절한 후로는 집에 돌려보냈나 봐요. 눈을 뜨니 거의 시체나 다름없던데요. 살은 다 찢겨져 있고 온 몸이 멍들어 있었습니다.

- 가혹한 생활을 하셨군요. 체벌 외에 일을 하다가 다친 적은 없었나요?

한 번은 탄광에서 일하다가 탄을 나르는 차바퀴에 다리가 끼어 들어갔어요. 너무 심하게 다쳐서 진료소에서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완강히 거부했어요.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다리 한쪽이 없던 언니 한 명이 친구들에게 심하게 놀림을 받았던 적이 있거든요.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어떻게 해서든 다리를 자르는 일은 막아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직장에다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집에 가서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물리치료랄까요, 그런 방법을 썼습니다. 북한에서는 염장무를 많이 활용하는데, 염장무나 소금물로 소독도 하고요. 그렇게 해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진료소 소장이 저더러 아주 ‘독한 년’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썩을 것 같았던 다리로 저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는 거예요. 만약 그 때 다리를 잘랐으면 이렇게 탈북해 오지도 못했겠죠. 지금은 다행히 잘 걷습니다만, 비가 오면 다리가 유난히 시려요. 다리를 세게 때려도 감각이 없고요.

- 마지막으로 지난 세월 해제민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했던 날들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너무나 억울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잃어버린 삶을 누가 되돌려주나 싶고요. 북한에서 살지 않았다면 몸과 마음에 이런 상처를 입지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지금도 김정은 가문을 원망하며 삽니다. 다만 이렇게 라디오 방송에 나온 건, 제 목소리를 듣고 북한 주민이 한 명이라도 더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을 테니까요. 그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아무리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이 끝나면 사회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정치범수용소의 해제민들을 사회로 내보내지 않고 수용소 생활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즉시 18호 수용소의 해제민들을 석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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